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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칼럼] 강제징용은 없었다. 73만명의 취직 대박이 있었다.

김두용 기자 | 기사입력 2019/10/28 [09:49]

[지만원 칼럼] 강제징용은 없었다. 73만명의 취직 대박이 있었다.

김두용 기자 | 입력 : 2019/10/28 [09:49]

정신대에 대한 기본 지식

 

 

▲ 지만원 박사     ©더뉴스코리아

정신대(挺身隊)라는 용어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자진하여 몸을 바치기 위한 부대”라는 뜻이다. 정신대의 시발은 조선의 학생, 농부, 주부, 일반백성들이 일본의 전쟁수행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희생정신을 가지고 몸을 바쳐 돕자는 취지에서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이었다. 원래 정신대라는 용어는 일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일본에 충성을 표시하려는 조선인들이 1941년 초부터 만들어낸 말이다. 당시 조선사회에 이런 모임은 매우 다양하게 결성되었고,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1941년이면 일제치하 32년째이다. 32년 동안 일본 통치에 적응해버린 조선인들, 일본에 의해 양반으로부터 해방된 조선인들은 조선이 독립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면서 일본을 고마워하며 살았다. 탈북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북조선 사람들은 일제치하의 삶을 동경한다고 한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인 1941년 11월, 근로자들이 대규모로 필요하게 됨에 따라 ‘국민근로보국협력령’이 발령되었다. 이에 따라 대대적인 노무동원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남성은 16-40세, 여성은 16-25세, 미혼여성을 대상으로 한다는 포고령이 발령됐지만 실제로는 거의 남성들만 징발됐다. 당시 일본정부는 여성에 대해서는 동원을 피하고 가급적 지방기업들에 가서 일을 하라는 정도의 권고만 했다. 1940-44년 사이,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미국이 고용한 여성근로자는 50%나 급증한 반면, 그 전쟁의 다른 당사국인 일본이 고용한 여성은 불과 10% 증가했을 뿐이다.

 

1944년 1월, 일본총리 도오조는 항공기 제작 및 기타 중요 기간산업체들에서의 노동을 위해 여자근로정신대를 발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서부터 여성을 근로 현장에 본격적으로 투입하려는 움직임이 일게 되었고, 1944년 8월 22일에는 일왕의 칙령 제 519호로 포고되었다. 12세 이상 39세 미만의 여성을 징발하는 것이었다. 최초 봉사기간은 1년, 그리고 나중에 2년으로 연장되었다. 동원된 조선인 부녀자는 간호보조, 군수품생산, 기타 전시 잡역에 종사했다.

 

가장 유명한 정신대의 중의 하나는 ‘토요카와 여자근로정신대’이다. 아이치 현에 위치한 토요카와 해군병기공장에서 일했던 여성근로정신대를 뜻하는 것이다. 이 정신대는 1944년 여름에 편성되었다. 당시 일본은 게이샤 바를 포함한 모든 유흥업소들을 폐쇄시켰기 때문에 거기에서 일하던 식모, 점원, 접대부는 물론 가정에 있던 미취업 소녀들까지도 대거 참여하거나 동원되었다. 이들 정신대들에 가장 큰 고통은 식량난과 폭격이었다. 성 착취가 전혀 아니었다. 정신대는 근로의 성격상 최소한 국민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만 차출되었다. 서울, 인천, 광주, 부산에 있던 중학 및 실업학교 여학생들이 대거 정신대에 동원됐다. 정신대 차출은 학교 교사들이 했다. 형식은 지원제였지만 교사들에게는 할당량이 부과되었다. 이런 할당제는 지금의 한국의 행정현실과 똑같은 것이었다.

 

“정신대원들은 일반적으로 국내 기업들에서 일했지만 일부는 일본, 만주, 중국, 싱가포르 등지의 공장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파견된 사람들은 회사 기숙사에서 지냈다. 기숙사 료모(기숙사 관리인-여성 도우미) 항상 아침에 배웅하면서 격려의 말을 해주었고, 료부는 이들을 차에 태워 공장으로 바래다주었다. 하루에 8시간 일을 했고, 매주 하루를 쉬었다(해방전후사의재인식 447쪽). 이들은 노임을 저축하여 전후에 학업을 계속했다.(553쪽)” 이들은 대구 근처에 있던 방직공장, 큐수의 오무타와 나가사키에 있던 탄광에서, 나고야에 있던 미쓰비시 비행기공장 등에서 일을 했다(해방전후사의재인식 450쪽). “1999년 3월1일, 다섯 명의 옛 정신대 여성들이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을 때, 일부는 가명을 사용했고, 다른 일부는 얼굴 공개를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이 위안부로 오해받는 일을 피하려 했다”(해방전후사의 재인식 452쪽).


‘강제징용’ 개념 정리

 

강제징용과 일본군위안부는 반일종족들이 국민들을 선동하기 위해 날조한 낱말들이다. 일본을 야만의 나라 악마의 나라로 인식시키고 증오케 함으로써 한미일 삼각안보체제를 허물고 그 결과 남조선을 붕괴시키려는 종북주의자들의 핵심전략인 것이다. 이들 종북주의자들은 김일성 종교에 병든 사람들로, 민족의 정통성은 북조선에 있고 남조선은 태어나서는 안 될 더러운 나라라는 교리를 주입한다. 강제징용과 위안부라는 주제는 한국국민들로 하여금 일본을 영구적으로 적대시하게 만들기 위한 이념상품이다. 어려서부터 증오심을 가슴에 물려받은 종족들은 그 증오심으로 인해 도덕심과 인간성 그리고 지식을 습득하지 못해 늘 자기들이 속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열등의식과 소영웅주의는 동전의 앞뒤다. 덜 떨어진 사람들은 반일감정을 강하게 표출하는 것이 남들부터 애국자인 것처럼 그리고 지식인인 것처럼 인정받는 길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팩트가 없다. 문제는 언론 대부분이 종북주의자들의 노예가 돼 있다는 사실과 대다수 국민들이 보도매체를 맹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대다수 국민들이 독서의 빈곤으로 인해 생각하는 능력이 길러지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저자가 연구한 것, 이영훈 등이 연구한 것을 종합해보면 ‘강제 위안부’도 없었고, ‘강제징용’도 없었다. 반면 일본이 미개한 조선인들을 개화시켰다는데 대한 증거들은 사방에 널려있다. 조선인들은 일본에 비해 열등한 종족이었지, 인종차별을 받는 종족은 아니었다. 일본은 교육이 없는 곳에 거대한 학교를 세웠고, 거짓말 하지 말라는 도덕교육을 가장 많이 시켰다.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인종차별은 국가차원에서 없었다. 음습한 곳에서 자라는 독버섯들처럼 해방 후 이 땅에는 일본으로부터 탄압당한 공산주의자들과 그 후손들이 일본에 원수를 갚자며 음습한 공작들을 했다. 반일종족들이 꾸며낸 문화공작이었던 것이다.

 

1939년 9월부터 조선 청년들에게는 로망의 길이 열렸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항공모함을 만들어 하와이 미 해군기지를 초토화시킴으로써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렇게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느라 1939년부터 일본인 청년들이 대거 공장에서 군대로 징집돼 나갔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 12개국을 점령했다. 군대는 800만으로까지 늘어났다. 이들 800만 군대는 주로 일본 국민들로 충당됐다. 기업에서 일하던 일본청년, 취직하기 전의 일본 젊은이들이 모두 일본군대로 징집되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 기업들에는 근로자가 고갈됐다. 기업들에 빈자리가 많이 생기자 비로소 조선청년들이 자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1939년 9월부터 무려 73만개의 일자리가 한국청년들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지원자를 뽑을 때에는 마치 1964년 서독광부를 선발할 때처럼 경쟁률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1939년 9월부터 해방을 맞을 때까지 6년 동안 73만 명의 근로자들이 일본에 간 것으로 보인다. 한국청년들은 일본에서 차별대우를 받지 않았고 퇴근 후에는 월급을 가지고 유곽과 술집을 찾을 정도로 자유로웠으며, 고국으로 돈을 보내 전답을 마련했다는 집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탄광에서 일하는 청년들은 일본 순사나 대학생 초봉의 몇 배나 되는 월급을 받았다 한다. 여기까지가 해방 직전의 조선청년들이 일본에 취직해 일본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는 데 대한 이야기다. 좌익들이 왜곡시킨 강제징용 사례는 탄광의 광부들에 대해서다. 좌익들은 조선광부들이 임금도 받지 못했거나 받았다 해도 일본인의 절반 정도였으며, 그 중 상당 부분은 공제돼 실제 받은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혹사당해 갈비뼈가 돌출했고 자유도 없었다고 주장해왔다. 여기에 더해 민족적 차별을 받아 이유 없이 구타당하고 린치 및 감금을 당해기가 일쑤였다고 주장해왔다. 이렇게 왜곡하기 위해 빨갱이들은 사실과 다른 엉뚱한 사진들을 교과서 등에 게재했다.

 

이에 대해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우연이 발표했던 임금표를 제시한다. 각 광산에서, 일본기업이 한국인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들이 받은 임금은 대동소이했다. 때로는 한국 노동자가 일본 노동자보다 최고로는 30%나 더 높은 경우도 있다. 이는 숙달정도에 따라 그리고 가족수당, 초과근로수당 등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우연은 “같은 탄광에서 5년 이상 장기간 근속한 일본인이 전체 일본인의 31%나 되지만, 조선인은 아무리 길어도 3년 미만”이라고 밝혔다.

 

또한 광부의 월급은 일본 초임순사 봉급의 3.67배이고, 서울남자교원의 4.56배나 되었다. 조선인 광부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했으며, 어떤 광부는 술집도 다니고, 화투치고, 유곽에 다니다가 다음날 작업장에 결근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번 돈을 탕진한 경우도 있었을 정도로 자유를 누리고 지냈다 한다. 아래 신문을 보면 “일본탄광에 돈벌러간 조선인 인부”가 고향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금을 냈다는 뉴스가 있다. 강제로 동원돼 간 인부가 아니라 돈을 벌려고 간 인부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광부가 일본 탄광에서 번 돈을 고향에 기부했다고 한다.

 

100년 전의 일본 굴지의 기업들을 일으킨 창업자들의 인격과 그들의 경영철학은 지금 이 나라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기업 수장들이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있었다. 그들은 근로자들을 매우 사랑하는 덕망 높은 사람들인 것으로 국제사회에 널리 인식돼 있다. 마츠시타 고노스케, 도요타 카이치로, 아키오 모리타 등 훌륭한 기업인이자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사상가요 교사들인 일본기업 경영인들에게 강제노역이다, 학대다, 무임금 착취다 등의 언어들로 굴레를 씌우는 것은 우물 안 원숭이 족들이나 할 수 있는 저질행위다.

 

강제징용 주제를 반일 모략상품으로 삼은 이유

 

그런데 이런 자연스러운 현상이 왜 반일장사 상품으로 악용되었을까? 그리고 반일종족은 왜 생겨났을까? 1919년 레닌이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을 창설했다. 세계의 노동자들은 국경 없이 소련과 함께 하자고 선동했다. 공산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공산주의를 모르면 지식인이 아니라는 선동용어들이 난 체하기 좋아하는 어릿광대들을 유혹했다. 일본도 미국도 이런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이 붉은 벌레들은 조선 땅에도 생겼고, 일본 본토에도 생겼다. 일본경찰은 일본본토와 조선 땅에 범람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고 재판에 넘기는 일로 벅차했다.

 

1925년 안동출신 김재봉이 러시아의 코민테른(국제공산당)으로부터 밀명을 받고 서울에 와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이래 공산주의자들은 일본경찰로부터 끝없는 사냥을 당했다. 통계가 없는 지금, 그때부터 독버섯처럼 지하에서 자라 지금까지 확대된 공산주의자들의 숫자는 아마도 남한인구의 절반을 넘을 것이다. 오늘날 남북한 빨갱이들이 공동으로 일본을 증오하는 것은 첫째, 이렇게 공산주의자들을 사냥한 일본경찰에 대한 복수심 때문일 것이고 둘째, 김일성 종교의 근본이 “김일성의 항일 유격전 신화”에 터를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61년 박정희가 군사혁명을 할 때 “반공이 국시”였듯이 북조선에서는 “반일이 국시” 인 것이다. 바로 이런 북조선을 추종하는 빨갱이들이 한국의 역사교과서를 장악하고, 문화를 장악하여 반일감정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해방 후 이승만 정부로부터 박정희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을 사냥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들에 대한 원한을 수도 없이 쌓았다. 1946년의 9월 총파업, 10월 1일부터 46일 동안이나 지속된 대구폭동사건, 4.3반란사건, 여수순천반란사건, 6.25전쟁 등을 통해 빨갱이들은 많은 탄압을 받았다. 아마 수백만은 될 것이다. 이런 종족들과 그 후손들이 이 나라에 범람하기 때문에 이들은 이승만-박정희에 대들다가 급기야는 1980년 5월, 북한군을 광주에까지 불러들여 국가를 뒤엎으려 한 것이다. 이런 종족들이 바로 [5.18종족]인 것이다. [반일종족]과 [5.18종족], 이들이 지어낸 거짓말은 그 성격이 100% 서로 닮았다.

 

반일종족들은 박정희가 근로자들을 학대하고 착취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을 형상화하기 위해 전태일(1948)을 착취의 로고로 내세웠다. 하지만 박정희는 당시의 실업률 30%로 표현되는 아비규환에서 노동력이 모자랄 정도의 엄청난 일짜리를 만들어 준 산업화 영웅이었다. 당시 노동청의 집계에 따르면 평화시장과 통일상가, 동화시장에는 428개의 작업장과 7천6백여 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평화시장 일대 피복 공장 내의 직종은 대체로 재단사, 미싱사, 미싱보조, 재단보조, 시다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미싱사와 시다는 대부분 여공들이고 재단사와 재단보조는 주로 남자들로서 여공이 80~90%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임금은 시다가 월 1천8백 원에서 3천원, 미싱사가 7천원에서 2만5천원, 미싱보조가 3천원에서 1만5천원, 그리고 재단사가 1만5천원에서 3만원 정도였다. 당시에는 기술자와 기능공이 사장 봉급에 버금가는 높은 봉급을 받았다. “대학 가야 소용없다. 기술이 최고다” 남한 경제가 눈부시게 부흥하자 김일성의 눈이 질투심으로 뒤덮였다.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기업들을 도산시키기 위해 도시산업선교회가 발족되었다. 이 조직은 대학생들을 훈련시켜 기업에 위장취업 시켰다. 기업에 나간 대학생들은 순진한 근로자를 선택해 “네가 못사는 것은 국가의 잘못 때문”이라는 신념을 심어주었고, 소영웅심에 불타도록 선동했다. 때가 되면 순진한 노동자에게 대중 앞에서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라 설득한다. 어린 노동자가 대중 앞에서 신나를 뿌리고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순간 누군가가 성냥을 그어댄다. 1970~80년대에 이런 식으로 불에 타 죽은 어린 근로자가 17명이나 된다. 이것이 이른바 시체장사였고, 그 제1호가 전태일이었다.

 

전태일이 빨갱이에 의해 희생됐다는 것은 중고생이 읽는 “다시 쓰는 이야기 한국사 2”의 195쪽과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사 편지 5”의 203쪽에 잘 나타나 있다.

 

“위인 전태일”

 

“전태일 열사는 쌍문동, 도봉산 기슭에 있는 판잣집에 살았다. 1970년 11월 12일 아침,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내일은 좀 심상치가 않습니다. 오후 1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서 구경하세요.”

 

“국민은행 앞, 현수막에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500여명의 노동자들이 경찰에 쫓기고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시위대 옆 골목에서 불길로 온 몸에 불길을 뒤집어 쓴 사람이 튀어 나왔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바로 전태일이었다. 불에 타고 있는 전태일의 손에는 근로기준법 책자가 쥐어져 있었다”

 
 
바로 이 부분이다. 자기가 죽을 줄 알면서도 자기 어머니에게 그 죽는 모습을 구경하러 나오라 할 자식은 없다. 그리고 몸 전체가 불에 활활 타고 있는데 어떻게 그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이렇게 긴 말을 외칠 수 있는 것이며, 화염에 휩싸인 그의 손에 종이로 만든 책자가 어떻게 쥐어져 있을 수 있었겠는가? 박정희는 한 중소업체 사장에게 친필서한을 써 보냈다. 어린 여공들이 야간에라도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면 매우 감사하겠다는 겸손한 편지였다. 이런 박정희의 위업을 훼손하기 위해 빨갱이들이 전태일 등 17명의 어린 근로자들을 인간불화살로 희생시킨 것이다. 박정희를 비하하기 위해 전태일을 우상으로 만든 것처럼 빨갱이들은 일본을 비하하기 위해 강제징용집단과 위안부집단을 우상으로 만든 것이다. 아래는 빨갱이들이 박정희 동상을 훼손해 놓은 모습이다. 바로 강제징용과 일본군위안부를 성역화 하는 그 집단의 소행인 것이다.

 

 

2019.10.24.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외부 필자의 기고는 <더뉴스코리아>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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