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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칼럼] 기억이냐 혐오냐? 문제의 위안부소녀상

김두용 기자 | 기사입력 2019/11/23 [13:03]

[지만원 칼럼] 기억이냐 혐오냐? 문제의 위안부소녀상

김두용 기자 | 입력 : 2019/11/23 [13:03]

기억이냐 혐오냐? 문제의 위안부소녀상

 

 

▲ 지만원 박사     ©더뉴스코리아

20198월 초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에서 의사를 하던 반듯한 한국계 여성 엘리스가 연구차 호주에 갔다가 호텔에서 위안부로 오해돼 봉변을 당한 사건이 보도됐다. 위안부의 나라가 된 한국, 한국계 여성이 혼자 호텔에 가면 위안부로 오해되어 투숙할 권리를 박탈당할 것이라는 논리적 가정이 사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 불쾌한 이미지-메이킹의 조각자는 단연 위안부소녀상일 것이다. 엘리스 얼굴에 위안부소녀상이 오버랩 되었을 것이다. 위안부를 신격화시킨 이상한 사람들이 한국여성 모두에게 안겨준 이 저주스런 수모, 언제까지 당해야만 하는가? “엄마, 나도 크면 이렇게 훌륭한 위안부 될래~” 기억이냐, 혐오냐? 이 조형물은 이제 국민법정에 서야 한다. 이것들이 국토를 수놓고 있는 한, 얼굴 들고 다니기 괴롭다. 거리를 오가야 하는 내 안사람과 내 딸, 외국관광객에 위안부로 보이면 어떻게 하나~

 

소녀상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위안부의 진실(조선과 일본 154~210)

 

조선양반 위안부: 조선은 10%의 양반이 90%의 동족을 노예로 부렸다. 여성노예는 남성노예의 또 노예였다. 3천 명의 노예, 1만 명 노예를 가진 양반도 있었다. 노예는 당나귀 값의 절반 이하, 모든 여성노예는 양반의 성노예 대상이었다. 화대도 없고, 사랑도 없었다

 

조선시대 여인 가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조선시대 여성 사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중국이 끌어간 위안부: 조선은 예쁜 처녀들을 원했다. 사대부와 왕실의 처녀도 공녀가 되었다. 더러는 노예로 죽고 더러는 환향했지만 고향은 그들을 화냥년이라 손가락질 했다. 수백 년 동안 조선여성은 중국에 가서 일노예 성노예로 살다가 버림받았다. 그 중엔 공주도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1937년부터 한시적으로 존재했다. 일본군은 아시아 12개국을 점령하면서 일본군 병사들이 여염집 규수를 겁탈할 것을 염려해 위안부 부대를 운영했다. 폭력을 금지시키고, 시간별 계급별 화대를 규정하고 성병을 관리했다. 한군군도 6.25때 위안부 부대를 운영했다. 위안부 모집 광고가 많이 있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일본군 위안부의 40%는 일본여성이었다. 중국여성 30%, 조선여성 20%, 나머지가 현지여성 및 유럽에서 돈벌러간 여성들이었고, 조선여성은 연인원 3,500명 정도였다 한다. 상해 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는 회상했다. “위안부 문제를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부끄럽지만 위안부 방안의 창설자다. 쇼와7(1932)의 상하이 사변 때 두 세 건의 강간죄가 발생했으므로 파견군 참모부장이었던 나는 그곳 해군을 본떠 나가시키현 지사에게 요청하여 위안부 단을 불러들였다. 그 후 강간죄가 완전히 그쳤기 때문에 기뻤다위안소의 원조는 상해위안소였다. 상해는 개인적인 돈벌이를 위해 일본인 매춘여성(가라유키상)이 해외로 나간 가장 전형적인 케이스다.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은 1880년대부터 가라유키상에 대한 단속에 나섰다. 이것이 공창제도의 시발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문옥주씨의 증언을 담은 책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문옥주씨의 증언을 담은 책



위안의 여왕 문옥주: 버마에 간 대구출신 위안부 문옥주는 일본 장병들에 인기녀였다. 불과 2년 동안 위안부를 하면서 화대는 물론 두둑한 팁까지 받아 다이어 반지도 사고 악어백도 사고 일본군 병사와 사랑도 했다. 헤어진 지 50여년인데도 그 병사가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 다른 한 위안부는 일본 병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의 씨를 받아 대구로 와서 아이를 정성껏 키웠다. 문옥주는 자서전에서 그 시절이 그립다고까지 했다. 버마에서 벌어 온 돈으로 가세를 일으키고 사업을 벌여 그 후 30여 년 동안 화류계의 프리마돈나가 되었다. 위 책의 133쪽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악어가죽 핸드백에 하이힐을 신고 녹색 레인코트를 입은 멋진 차림으로 사이공의 거리를 활보했다. 아마 누가 보더라도 내가 위안부로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날의 기억을 떠 올리면 아주 그립고 그 때의 자신만만함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조선의 부모가 딸들을 위안부로 내몬 대표적 사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권에는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소정희 교수의 논문이 실렸고, 여기에 문필기, 이득남, 이상옥, 김옥실, 배족간, 송신도의 증언들이 소개돼 있다. 6명의 위안부들은 견디기 어려운 가정폭력으로부터 탈출하여 신여성의 꿈을 선동하는 브로커들에 속아 위안부로 간 케이스에 해당한다. 아래 신문에는 돈에 눈이 먼 아버지가 1,300원 받고 딸을 위안부로 팔았다는 기사가 있다. 이조시대의 아버지는 딸을 노예로 생각했기에 딸을 죽이는 일도 다반사, 인신매매 단을 통해 중국이나 일본에 팔아넘기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프랑스 선교사 샤를 들레가 말했다 조선의 굶주린 주민들은 중국의 밀수업자들에게 자신들의 어린 딸들을 한사람 당 쌀 한말에 팔았다.” 

 

1) 문필기: 정대협이 매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주최하는 시위에 늘 참가하는 여인이다. 1943년 후반부터 2년 동안 만주의 군위안소에서 일했다. 1925, 29녀를 둔 구멍가게에서 태어났지만 공부가 그리웠다. 아버지는 가시내가 공부하면 여우밖에 될게 없다며 화를 냈다. 어머니가 몰래 쌀 한 말을 팔아 보통학교에 넣어주었다. 일주일 안 돼서 아버지가 딸을 교실에서 끌어내고 책을 불태워 버렸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딸을 죽어라 패고 집에서 쫓아내 버렸다. . 1943년 가을, 마을에 사는 일본 앞잡이 50대 아저씨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 해서 따라나섰다. 18세였다. 차에 태워 부산으로 데려갔다. 긴 머리를 자르고 치마저고리를 벗기고 원피스를 입혔다. 그리고 다른 네 명의 여인들과 함께 곧장 만주로 이송됐다. 문필기는 매주 수요일 12시에 일본 대사관 앞에 나와, 일본이 자기를 강제로 연행해 가서 위안부로 삼았다며 사죄와 피해 배상을 요구했다.

 

2) 이상옥: 아버지는 경북 달성면 면장에다 부농이었다. 9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오빠가 계집애를 학교에 보내서 어디다 쓰느냐며 학교를 못 가게하고, 책을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렸다. . .그해 서울로 도망가 소리개 집에 들어갔다. 9명의 처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 의해 팔려왔다고 했다. 15세인 그녀가 가장 어렸다. 이 여인들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니, 시모노세키였다. 그들을 인솔한 군속이 열 명의 처녀들을 넘긴 곳은 바로 조선인 부부가 운영하는 군 유곽이었다. 이 여인은 일본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일본 군병원에 일하면서 봉급도 받았다. 일본 군의관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조선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날 폭격을 맞아 허사가 됐다.

 

3) 이득남: 1918년생, 1939년부터 3년은 중국에서, 또 다른 3년은 수마트라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주정꾼이자 노름꾼으로 이유 없이 마구 때렸다. “집에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이웃 친구와 함께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을 찾기 위해 기차를 타고 인천 방직공장으로 갔다. 그게 위안부로 가는 길이었다.

 

4) 김옥실: 1926년생, 때리는 아버지가 보기 싫어 가출했다. 하루는 평양에서는 기생이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 고운 옷 입고, 고운 가마 타고 다닌다는 기생이 되고 싶어 기생집으로 가서 양녀가 됐다가 아버지에게 끌려 나왔다. 다시 양말 공장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인신매매단에 걸려들었다.

 

5) 배족간: 1922년생, 자살까지 기도했을 정도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광목공장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동네 구장에 속아 집을 나간 것이 곧 중국행이 되었다. 중국의 여러 위안소들을 떠돌았다. 1946년 집으로 돌아왔지만 모녀는 다시 남남이 되었다.

 

6) 송신도: 1922년생으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16세 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수많은 잡직들을 전전하다가 좋은 직장 구해주겠다는 이웃의 꼬임에 빠져 중국으로 갔다가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일본인 병사가 결혼하자고 하여 일본으로 동행했지만, 그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버렸다

 

2019.11.23.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외부 필자의 기고는 <더뉴스코리아>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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