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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이도수 교수의 <나의 연하스승님들> 소개시리즈 (4)

김두용 기자 | 기사입력 2021/02/02 [14:02]

[인물포커스] 이도수 교수의 <나의 연하스승님들> 소개시리즈 (4)

김두용 기자 | 입력 : 2021/02/02 [14:02]

 

▲ 원암 선생과 부인 이갑희 여사가 1919년에 결혼한 지 만 60주년이 되는 1979년 5월에 회혼례를 맞아 기념으로 찍은 사진  © 더뉴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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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뉴스코리아=김두용 기자] 일본에서 페스탈로치 교육 정신을 전수받아온 이규동 선생이 한국에서 그 교육 정신을 뿌리내리게 한 과정을 이 선생의 애제자 이도수 교수를 통해 들어보았다.

 

: 저번 대담에서는 이규동 선생이 일본에서 많은 수난을 겪으면서 페스탈로치 교육 정신을 전수 받은 과정을 말씀해주셨는데 이번에는 그 분이 한국에서 그 정신을 어떻게 실천하셨는지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 , 그 분이 26세에 귀국하자마자 자리 잡은 데가 대구고보였어요. 대구고보는 해방 전에 우리나라 3대 명문고보 중 하나였기에 영재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에서 거기를 선택한 듯합니다. 그러나 거기가 그 분의 고난의 수렁이 될 줄은 미처 모르셨나 봅니다.

 

: 아니 왜 고난의 수렁이 됐습니까?

 

: 그 학교는 일제가 세운 공립학교라 일제식민지 교육 정책을 따라야 했어요. 당시 초등교육기관인 보통학교에서부터 일본어만 쓰게 되어 있었으니 고보에서는 더 심했지요. 그러나 세종대왕의 후손이자 우국지사인 부친의 뜻을 받들어 이규동 선생은 영어수업시간에 틈틈이 한글을 가르치다가 발각되어 몇 번 주의를 받은 끝에 결국 강제퇴직 당하고 말았어요.

 

직으로 지내던 중 설상가상으로 폐결핵에 걸렸으나 부인의 극진한 간병으로 구사일생으로 회복되어 대구의 민족사학 대륜학교에 취직했어요. 그 학교에서 항일 민족시인 이상화와 뜻이 맞아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섰어요. 그러다가 일제 말기에 대륜중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어요.

 

: 그럼, 본격적인 페스탈로치 교육 정신을 실천한 것은 해방 후 부터였겠네요?

 

: 맞아요.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이규동 선생을 경상북도 학무국장으로 발령내려하자 본인이 극구 반대하여 그 분이 추천한 다른 분을 발령 내었대요.

 

: 왜 반대하셨는데요?

 

: 자기는 교육 관료보다는 학생을 직접 가르치는 학교에 근무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이자 보람으로 여긴다는 신조를 밝혔어요.

 

▲ 이규동 선생 40대 시절 / 좌측부터 부부, 둘째 딸, 외국인 교수     ©더뉴스코리아

 

: 그래서 학생을 직접 가르치는 직장을 택한 것이 경북대학교 사대 영어과였어요?

 

: 그래요. 국립경북대학교가 창립되기 전에 대구사대라는 전문대학급 교육기관에 출강하셨어요. 그 후 대구의전, 대구사대 등이 모태가 되어 국립경북대학교가 창립될 때, 창립추진주역을 맡으셨어요.   

 

: 교수님께서 그 분의 직접 가르침을 받으셨어요?

 

이 : 그럼요. 경북사대영어과에 59년도에 입학한 15회 졸업생이었어요. 입학당시 이규동교수 님은 55세였는데 영어과 주임교수에다 사범대학장서리를 겸직하고 있었어요.

 

: 그 분이 다른 교수님과 구별되는 특이점이 무엇인가요?

 

: 강의 첫 시간부터 모든 수강생들의 개별이름을 부르고 질문을 던지면서 수강생 전원을 완전 장악한다는 점이 나의 초등 6학년 담임선생님과 같았어요. 다른 점은 초등 단계 호랑이 선생님처럼 체벌로 엄하게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개인에 대한 무한 관심과 칭찬으로 기를 북돋운다는 점이었어요.

 

강의시간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복도에서나 시내버스 안에서나 만나면 이름을 부르며 자네가 제출한 과제가 잘 되었다느니, 왜 여태 제출하지 않았느냐는 등의 대화로 관심을 표하셨어요. 그 분의 후배 교수나 제자 교수들은 감히 엄두도 못내는 개별학생에 대한 무한관심 표명이 그 분의 특징이었어요. 제자들에 대한 무한관심은 졸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어요. 졸업 후 오래된 제자가 주례부탁을 위해 선생님 댁을 찾으면 이름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재학 중에 잘한 점을 기억하여 덕담을 늘어놓으셨어요. 그러기에 경북사대 영어교육과 졸업생 중에 그 분을 스승으로 존경하지 않는 제자는 없어요. 

 

: 그 많은 제자 중에 어떻게 교수님이 그 큰 스승의 일대기를 쓰시게 되었어요?

 

: 그 분이 타계하신 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스승님을 기리기 위한 문집 <영원한 스승>을 펴내기로 했어요. 당시 스승님 1세대 제자들은 연세가 80대라 그 중대사를 추진할 형편이 못되었기에 2세대 제자들 중에서 적임자를 찾다보니 내가 적임자로 지목되었어요. 나는 당시 정년퇴임을 앞두고 제반 정리에 바빠 그 중대사를 맡을 여력이 없었는데, 대선배님들의 엄명을 거스를 수가 없어 떠맡았어요. 처음에는 원고 청탁 대상을 경북사대 영어과 졸업생으로 한정하고 메일로 원고 청탁 글을 보냈는데 뜻밖에도  부 총리실, 모 은행장실, 모 장관실, 모 재벌총수실 등에서 문의가 쇄도했어요. 

 

▲ 이규동 교수의 2세대 애제자 이도수의 결혼주례를 맡았을 때의 모습(1967년 1월 21일)     ©더뉴스코리아

 

: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그런 고위인사들에게서 문의가 왔는데요?

 

: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고, 그분들이 10대 때에 대구고보에서 이규동선생으로부터 영어를 배운 제자라며 자기들도 그 스승에 대한 추억담을 써내면 안 되겠느냐는 문의였어요. 영어교육과 1세대 선배님들과 의논 끝에 그 분들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했어요.

 

: 그 분들이 그 당시 연세가 90대였을 텐데 그때까지 현직에 계셨어요?

 

: 실은 나도 그 때문에 헷갈렸는데, 우리나라 관행이 관직을 지낸 인사들은 은퇴 후에도 그 관직을 내세우며 대외활동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70여 년 전에 이규동 선생님의 제자였음을 내세우며 원고를 보내겠다고 하신 몇 분만 소개하면 김준성 부총리, 주양자 보건복지부 장관, 이종항 국민대학교 총장, 김태한 계명대 총장, 김영희 경북대총장, 수필가 김진태 등이었어요. 그들이 옛날 10대 때에 이규동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평생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고 선생님이 일본 히로시마 고등 사범에서 Harrison 교수로부터 받은 페스탈로치 정신이 한국 제자들 마음 속에 확실히 뿌리내렸구나 싶었어요.

 

: 그 큰 스승님으로부터 페스탈로치 교육 정신을 이어받아 교육현장에서 실천한 대표적 인사들은 어떤 분들이 있습니까?   

 

: 첫 손가락으로 꼽을 분이 김태한 계명대학교 총장이었습니다. 그 분은 스승이신 이규동 교수님을 기독교인으로 영세 받게 하여 대구남산교회 장로로 시무하게 하신 분입니다. 또 한 분은 경북대학교 총장 김영희 박사인데, 스승 이규동선생에게 명예박사학 위를 수여하셨습니다. 또 한 분은 자칭 이규동 교수님의 문외제자 민영빈 시사영어사 사장입니다.

 

: 문외제자란 무슨 뜻입니까?

 

: 6.25사변 때 대구에 개설한 전시임시대학에서 이규동 교수님의 자상한 가르침에 감명받아 후일에 우리나라 최대영어교재회사 시사영어사를 차린 민영빈 사장이 자신이 스스로 문외제자라 칭하면서 이규동 스승님에 대한 보은차원의 거금을 쾌척하여 원암문화재단 설립의 종자돈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이규동 교수님에게는 문외제자 외에 가내제자도 있습니다.

 

슬하 4남매 중 셋째이자 둘째 딸인 이기남 박사는 부친의 페스탈로치 교육 정신을 받들기 위해 한국최초의 Mac Base컴퓨터 한글서체를 개발하여 보급시키고 사재 수 백억대를 들여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에게 한글을 보급하는 사업을 펼쳤어요. 이 모든 결실이 이규동 선생님께서 제자들을 당신의 어깨위에 올려 세워 진리의 금자탑을 쌓도록 격려하신 결과라 봅니다. 스승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부활해계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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